법정스님 / 묵언(默言)과 비겁한 침묵
鑑賞
말은 의사소통의 구실을 하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잡음의 역기능도 하고 있다. 구시화문(口是禍門), 입을 가리켜 재앙의 문이라고 한 것도 그 역기능적인 면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선승들은 3년이고 10년이고 계속해서 묵언을 지키고 있다.
수도자들이 침묵하는 것은 침묵 그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침묵이라는 여과 과정을 거쳐 오로지 ‘참말’만을 하기 위해서다. 침묵의 조명을 통해서 당당한 말을 하기 위해서다. 벙어리와 묵언자가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언어의 극치는 말보다도 침묵에 있다. 너무 감격스러울 때 우리는 말을 잃는다. 그러나 사람인 우리는 할말은 해야 한다.
그런데 마땅히 입 벌려 말을 해야 할 경우에도 침묵만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와 같은 침묵은 때로 범죄의 성질을 띤다. 옳고 그름을 가려 보여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침묵은 비겁한 침묵이다. 비겁한 침묵이 우리 시대를 얼룩지게 한다.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디에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다. 당당한 말이 흩어진 인간을 결합시키고 밝은 통로를 뜷을 수 있다. 수도자가 침묵을 익히는 그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은 50여년 전(1974년)에 쓰여진 법정 스님의 “무소유” 중 “침묵의 의미”를 발췌한 것입니다. 세상이 변했다고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민생(民生)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탓인지, 시간을 초월하여, 요즘 세태를 개탄하는 스님을 면대하는 듯 여겨져서 독후감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 저자
- 법정
- 출판
- 범우사
- 출판일
- 1999.08.05
법정法頂
略歷
법정(속명 박재철朴在喆, 1932년 11월 5일 - 2010년 3월 11일)은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이자 수필가다. 무소유(無所有)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수십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설파하였다.
1954년 승려 효봉의 제자로 출가하고 1970년대 후반에는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佛日庵)을 지어 지냈다.
2010년 3월 11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에 위치한 길상사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세수 79세, 법랍 56세로 입적(入寂)하였다.
김수철 / 삶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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