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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시리즈]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종합 예술인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년 5월 22일 ~ 1883년 2월 13일)는 영향력 있는 독일의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 지휘자, 음악 이론가, 그리고 수필가이다.

 

이력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프로필 이미지

바그너는 새로운 교향악적 오페라(또는 "악극")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곡은 연속적인 대위법적 텍스처, 풍부한 화성과 오케스트레이션, 그리고 유도동기(Leitmotif; 특정한 인물이나 상황에 연관된 음악 동기)의 교묘한 사용을 눈여겨볼 만하다. 바그너의 반음계적 음악 언어는 유럽 고전음악의 향후 발전을 암시하며, 이는 극단적인 반음계법과 무조성을 지향한다. 그는 음악적 사고를 그의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이라는 발상을 통해 전환해 나갔고, 이는 바그너의 기념비적인 네 개의 오페라 연작 니벨룽의 반지(1876)를 통해 잘 드러나 있다. 바그너의 유도동기와 통합적 음악 표현의 개념은 20세기의 많은 영화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바그너는 찬반이 극히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의 음악과 드라마에 대한 혁신에서 기인한 것일 뿐만 아니라, 바그너의 반유대인적인 시각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그너의 영향과 유산

바그너는 음악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문학사에서도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 천재이다. 음악사에서는 초기 낭만파의 뒤를 이어 낭만파 음악을 대성한 최고봉이며, 문학사에서는 신낭만파의 희곡 영역의 거봉이었다. 또한 니체에게도 영향을 준 그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염세주의, 종교적인 신비주의, 탐미주의적인 경향의 작품으로 19세기 말 낭만주의 부흥의 터전을 마련한다.

 

바그너의 유럽 예술과 문화에 기여한 바는 부인할 수 없으며 기념비적이다. 바그너는 그의 생전과 사후 여러 해 동안, 바그너 팬들 사이에서 거의 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그들 사이에서는 거의 신과 같은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특히 바그너의 음악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음악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많은 작곡가들은 바그너의 편이거나 반 바그너 편 중의 하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안톤 브루크너와 휴고 볼프는 그에게 특히 많은 빚을 졌으며, 세자르 프랑크, 앙리 뒤팍, 에르네스트 쇼송, 쥘 마스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한스 피츠너 등, 수많은 음악가들 또한 그러하였다. 구스타프 말러는 "오직 베토벤과 바그너만이 있었다"고 말했다. 클로드 드뷔시와 아르놀트 쉔베르크의 이십 세기 화성 혁명은 트리스탄으로부터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어떤 종류의 드라마적인 공연 동안에 불빛을 희미하게 해야 한다고 처음 요구했던 사람이 바로 바그너였으며, 관현악단 피트(바이로이트에서는 관중석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를 바이로이트 극장에서 처음 사용했던 것도 바그너였다. 바그너는 그의 작품이 청중들의 상상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극장"을 꿈꿨으며, 오디오 기기의 발달로 이 꿈은 현실이 되었다.

 

바그너의 문학과 철학, 미술에 대한 영향 또한 분명하다. 영향력 있는 저작물인 비극의 탄생 저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처음에 바그너를 숭배했는데, 그의 음악에서 유럽 정신이 다시 젊어지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는 《파르지팔》 이후에 바그너와 결별한다. 그는 《파르지팔》를 기독교 신앙심에 영합하는 표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20세기에, W. H. 오든은 한때 바그너를 "아마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했던 천재"로 불렀으며,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도 바그너에게 크게 영향을 받아 그들의 소설에서 바그너를 논했다. 바그너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며, 그의 오페라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작가 존 로널드 로웰 톨킨은 바그너와 그의 음악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톨킨 자신이 옥스포드의 고대영어 교수이었기에 북구 신화와 사가에는 정통했었고, 따라서 북구 신화를 차용한 바그너의 작품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C.S. 루이스가 열렬한 바그네리안이었으며, 20세기 초 유럽 문화계의 풍토를 보아도 바그너에 대한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었다. 게다가 톨킨은 C.S. 루이스와 함께 종종 바그너 공연을 보러 갔었으며, 한때는 C.S. 루이스와 함께 <니벨룽의 반지>의 2부 발퀴레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그는 바그너를 즐겨 들었고 또 열심히 연구를 했다.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느, 그리고 샤를르 보들레르는 그를 숭배했다. 사랑과 죽음(즉 에로스와 탄토스)의 관계에 대한 것 등 그의 음악 속의 많은 발상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한 정신 분석을 예고했다. 추상미술의 아버지 바실리 칸딘스키는 바그너 신봉자이기도 했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음악을 들으면서 색을 보는 공감각을 경험했다. 그 후 칸딘스키는 음악이 그림이 될 수 있고, 또 그림이 음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의 그림들은 대상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화로 바뀌게 된다. 또 칸딘스키는 '로엔그린'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바이올린, 베이스, 관악기의 울림, 나의 마음 속에서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야성적이며 미친 것 같은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라고 말했다.

 

바그너의 영향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한 때, 독일 음악계는 바그너 지지자와 요하네스 브람스 지지자의 두 파로 나뉘었다. 브람스 지지파는 강력한 비평가인 에두아르트 한슬릭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그는 전통 형태를 최고로 인정하고 바그너식 혁신에 반대하는 보수파를 이끌었다. 클로드 드뷔시는 바그너를 심하게 비판했던 사람이지만 ("그 오래된 중독자"), 바그너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작곡자 중 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사실 드뷔시는 바그너의 영향을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받았기 때문에 바그너와 결별할 필요가 있었던 많은 작곡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 wikiPedia / 리하르트 바그너

Selected Sound

Richard Wagner / Overture to Tannhauser

Conductor

Composer


바그너 / 탄호이저 서곡 앨범 이미지
Richard Wagner / Overture to Tannhauser